1959년 2월, 소련 우랄산맥의 한 오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랄공과대학의 숙련된 등반가 9명이 이상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들은 패닉 상태에서 영하 30도의 혹한 속으로 텐트를 벗어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발견된 시신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어떤 시신은 내부 장기가 없었고, 어떤 시신은 설명할 수 없는 방사능 흔적을 보였습니다.
소련 정부는 이 사건을 서둘러 은폐했고, 현장은 25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디아틀로프 사건'은 20세기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사건의 리더였던 이고르 디아틀로프의 이름을 따 '디아틀로프 고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젊은 등반가들의 희망찬 여정, 평화로웠던 시작
1959년 1월 23일, 이고르 디아틀로프가 이끄는 등반팀이 우랄공과대학을 출발했습니다. 팀원들은 모두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었지만, 산악 등반 경험이 풍부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우랄산맥 북부의 오트르텐 산(해발 1,234m)을 등반하고 '3급 등반 인증'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팀은 총 1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3세의 리더 이고르 디아틀로프를 비롯해 류다 두보니나(21), 게오르기 크리보니셴코(23), 알렉산더 콜레바토프(24), 지나이다 콜모고로바(22), 유리 도로셴코(21), 니콜라이 티보-브류놀로프(23), 류스템 슬로보딘(23), 세묜 졸로타료프(24), 그리고 유리 유딘(21)이었습니다.
등반 초기에는 유리 유딘이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 하차했는데, 이것이 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나머지 9명의 등반가들은 1월 27일 북부 만시 마을에 도착했고, 다음 날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팀은 충분한 식량과 장비를 갖추고 있었고, 모두가 경험이 풍부했기에 특별한 위험은 예상되지 않았습니다.
디아틀로프는 2월 8일까지 등반을 마치고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로 전보를 보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남긴 사진과 일기를 보면, 여행은 매우 즐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웃음 가득한 사진들, 기타 연주와 노래를 즐기는 모습,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일기의 내용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평화로운 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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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2월 26일 발견된 텐트의 모습 |
영하 30도의 공포, 텐트를 찢고 도망친 마지막 밤
2월 1일, 팀은 등반 목표 지점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캠프를 설치했습니다. 발견된 카메라와 일기장에 따르면, 이날 오후 5시경 그들은 다음 날의 등반을 위해 고도 880m 지점에 야영지를 마련했습니다. 해가 지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자 팀원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사진에는 텐트를 설치하는 모습과 해 질 녘의 풍경이 담겨있었습니다. 류다 두보니나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춥지만 모두가 건강하고 사기가 높다. 내일이면 목표 지점에 도착할 것 같다"라는 희망찬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현장 조사 결과,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등반가들은 갑작스럽게 텐트를 찢고 밖으로 뛰쳐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들이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어떤 이는 속옷 차림으로 텐트를 탈출했다는 점입니다.
발자국 분석 결과, 9명은 한꺼번에 텐트를 빠져나와 약 1.5km 떨어진 숲 쪽으로 달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한 듯 필사적으로 도망친 흔적을 남겼습니다. 전문 등반가들이 장비와 옷을 모두 버려두고 맨몸으로 눈 속을 달려간 것은 극도의 공포나 위험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맨발의 시신부터 방사능 흔적까지, 충격적인 발견
2월 8일이 되어도 약속된 전보가 도착하지 않자 대학 관계자들은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2월 20일, 수색팀은 디아틀로프 고개 근처에서 찢어진 텐트를 발견했습니다. 텐트는 내부에서 찢어진 상태였고, 모든 장비와 옷가지, 신발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식량과 술도 손대지 않은 채로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신들은 2월 26일에 발견되었습니다. 텐트에서 1.5km 떨어진 삼나무 아래에서 크리보니셴코와 도로셴코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맨발에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근처에 피워놓은 모닥불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있었는데, 이는 누군가 높은 곳에서 주변을 살피려 했음을 암시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디아틀로프의 시신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텐트 방향을 향해 누워있었고,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 슬로보딘과 콜모고로바의 시신도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텐트로 돌아가려다 동사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발견은 5월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4m 깊이의 눈 속에서 나머지 4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상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두보니나는 혀가 사라졌고, 티보-브류놀로프의 눈은 없어졌으며, 졸로타료프의 두개골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몸에서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방사능 반응이 검출되었고, 일부 시신의 피부는 갈색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내부 손상과 방사능 반응, 풀리지 않는 부검의 의문점
부검 결과는 이 사건을 더욱 미스터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사인은 저체온증이었지만, 나중에 발견된 시신들의 상태는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법의학자 보리스 보즈로제니의 보고서에 따르면, 졸로타료프의 두개골 손상은 "60km/h로 달리는 자동차에 치였을 때나 가능한 수준의 충격"이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외부 상처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두보니나의 경우, 혀가 사라졌지만 입 주변에는 어떠한 손상도 없었습니다. 콜레바토프의 몸에서는 심각한 내부 손상이 발견되었지만, 피부에는 멍조차 없었습니다. 법의학자들은 "극도로 강력한 압력이 가해졌으나, 외부 충격은 없었던 것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시신들의 옷에서 발견된 방사능 수치도 의문이었습니다. 특히 졸로타료프의 옷에서는 정상치의 4배가 넘는 방사능이 검출되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어떠한 핵 실험도 진행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또한 일부 시신의 피부와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변해있었는데, 이는 방사능 노출의 전형적인 증상이었습니다.
보즈로제니는 후일 "30년이 넘는 법의학자 경력에서 이런 사례는 처음"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의 보고서 일부는 아직도 기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부검에 참여했던 다른 의사들도 이례적으로 비밀 유지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서둘러 종결된 수사와 25년간의 현장 폐쇄 조치
소련 정부의 대응은 이 사건을 더욱 수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사는 불과 3주 만에 서둘러 종결되었고, 공식 사인은 "압도적인 자연의 힘(compelling natural force)"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사건 현장은 25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관련 문서들은 대부분 기밀로 분류되었습니다.
사건을 담당했던 이바노프 수사관은 후에 "위에서 수사를 중단하라는 강력한 압박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특히 의문스러운 점은 수사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자주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는 군용 헬리콥터가 빈번하게 목격되었고, KGB 요원들도 수색에 참여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유족들은 시신을 직접 확인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은 납관된 상태로 서둘러 치러졌고, 유족들은 관을 열어보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특히 두보니나의 아버지는 "딸의 시신이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추가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일부 문서가 공개되었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은 여전히 기밀로 남아있습니다. 2019년 러시아 검찰청이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이 역시 "눈사태가 원인"이라는 기존의 설명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눈사태 설은 시신들의 특이한 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군사실험부터 UFO까지, 64년간 제기된 온갖 가설들
디아틀로프 사건에 대해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군사 실험 가설입니다. 당시 소련군이 이 지역에서 비밀 무기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신에서 발견된 방사능 흔적과 특이한 내상은 이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러시아 언론인 알렉세이 라킨은 "소련군이 개발 중이던 초음파 무기 실험에 등반가들이 우연히 휘말렸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는 '인프라사운드' 가설입니다. 우랄산맥의 특이한 지형이 만들어내는 초저주파음이 등반가들에게 극도의 공포와 환각을 일으켰다는 설명입니다. 스웨덴의 음향학자 안데르스 에릭슨은 "특정 주파수의 인프라사운드는 인체에 극심한 공포감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세 번째로 제기된 것은 '쿠리바이트' 설입니다. 현지 만시족 원주민들이 말하는 설산의 눈의 정령이 이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만시족은 오트르텐 산을 신성시하여 접근을 꺼렸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트르텐'이 만시어로 '죽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미확인 발광 현상(UFO)' 가설도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현지 주민들과 다른 등반가들이 하늘에서 이상한 빛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2020년 공개된 군 문서에는 실제로 그 시기에 여러 건의 UFO 목격 보고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사태 가설도 있지만, 전문 등반가들이 눈사태의 위험이 있는 곳에 텐트를 설치했을 리 없다는 점, 그리고 현장에서 눈사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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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틀로프 고개 사건에 대한 위령비 |
새로운 희생자를 부르는 저주받은 고개의 미스터리
6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디아틀로프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2021년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디아틀로프 패스: 사망의 미스터리"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 정부는 추가 조사를 약속했지만 새로운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사건 현장은 이제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디아틀로프 고개를 찾아 9명의 영혼을 기리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현장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유족들은 이곳에서 매년 추모식을 개최합니다. 유리 유딘은 2013년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이곳을 찾아 동료들을 추모했다고 합니다.
더욱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1960년대에만 이 지역에서 세 건의 유사한 등반 사고가 있었고, 모두 미스터리한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2016년에는 디아틀로프 고개 인근에서 등반가 한 명이 실종되었다가 이상한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을 밝히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목격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고, 증거들은 사라지거나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남긴 의문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날 밤 디아틀로프 고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답은 아마도 영원히 눈 속에 묻혀있을지도 모릅니다.
Q & A
Q1: 생존자 유리 유딘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남겼나요?
A1: 유딘은 평생 이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함께 갔더라면 뭔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날 밤에 대해서는 "동료들이 무언가 끔찍한 것을 봤을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구체적인 추측은 하지 않았습니다.
Q2: 시신들에서 발견된 방사능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A2: 이에 대해 두 가지 주요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련의 비밀 핵실험설이고, 다른 하나는 등반가들이 사용한 랜턴의 토륨 성분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하지만 랜턴 설로는 높은 방사능 수치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Q3: 러시아 정부는 왜 아직도 일부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걸까요?
A3: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당시 소련의 군사 기술이나 비밀 실험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특히 냉전 시기의 군사 기술과 관련된 문서들은 현재 러시아의 안보와도 연관될 수 있어 여전히 기밀로 분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