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년 마젤란 해협의 기적
1741년 5월,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 마젤란 해협의 차가운 바다에서 한 척의 군함이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HMS 웨이저호였다. 당시 영국과 스페인은 '젠킨스의 귀' 전쟁으로 알려진 해상 분쟁 중이었고, 웨이저호는 스페인의 해상 무역을 견제하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칠레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중 거센 폭풍우를 만난 이 배는 결국 난파되어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남위 47도의 혹한과 거센 파도, 끝없이 이어지는 절벽의 해안선은 선원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하지만 인간의 놀라운 생존 본능과 강인한 의지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단순한 해난 사고의 기록이 아닌,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생존 이야기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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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을 만난 웨이저호 (상상도) |
HMS 웨이저호의 항해와 난파
HMS 웨이저호의 여정은 1740년 영국 포츠머스 항구에서 시작되었다. 28문의 함포를 장착한 이 군함은 조지 앤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일부였다. 앤슨 제독의 함대는 스페인의 태평양 무역로를 교란하고 식민지들을 공격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60여 명의 선원을 태운 웨이저호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태평양으로 가기 위해 마젤란 해협으로 향했다.
1741년 5월 14일,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시속 100km가 넘는 강풍이 불었고, 파도는 배의 높이를 훌쩍 넘었다. 젊은 선원 존 벌클리의 일지에는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된 듯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칠레 연안의 난폭한 바다는 웨이저호를 거칠게 몰아쳤고, 결국 배는 와카 섬의 거대한 암초와 충돌했다.
와카 섬은 칠레 남부 해안의 험준한 피오르드 지역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빙하가 깎아낸 절벽과 울창한 아열대림, 그리고 연중 내리는 비와 강풍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차가운 바닷물은 순식간에 선원들의 체온을 앗아갔다. 많은 선원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근처의 작은 섬으로 가까스로 헤엄쳐 도달했다. 140여 명의 선원 중 생존한 것은 고작 80여 명이었다.
죽음의 추위와 맞선 선원들의 투쟁
와카 섬에서의 첫날은 지옥과도 같았다. 섭씨 영하의 기온과 초속 20미터가 넘는 강풍, 그리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와 눈은 생존자들을 극한으로 몰아넣었다. 젖은 옷가지를 말릴 시간도 없이 선원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했다.
제2항해사 존 불켈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바다표범처럼 서로 밀착해 있어야 했다. 한 시간이라도 혼자 있다간 동사할 것만 같았다. 옷은 젖은 채로 얼어붙었고, 손가락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배에서 건져온 물품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남은 식량은 열흘치도 되지 않았고, 도구와 무기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선원들은 생존을 위해 바다표범을 사냥하고, 조개를 채집하며, 해초를 먹어야 했다. 특히 윌리엄 존스라는 젊은 선원은 바다표범 사냥법을 독특하게 개발했는데, 바다표범이 휴식을 취하는 바위까지 몰래 접근한 후 재빨리 곤봉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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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와카 섬에서의 생존자들의 모습 (상상도) |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들
선원들은 난파된 배의 잔해로 두 개의 임시 거처를 지었다. 돛과 밧줄로 지붕을 만들고, 바다표범 가죽으로 벽을 보강했다. 특히 목수 토마스 밀러의 역할이 컸다. 그는 난파된 배의 목재를 이용해 견고한 구조물을 만들었고, 이는 폭풍우를 견디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보트 제작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밀러의 지휘 아래 선원들은 배의 잔해에서 건진 도구들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못이 부족하자 배의 철제 부품들을 녹여 새로운 못을 만들었다. 방수를 위해 바다표범 기름과 섬에서 발견한 송진을 혼합해 특별한 코팅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식량 문제 해결에도 놀라운 지혜가 발휘되었다. 의무장교 엘리엇은 괴혈병 예방을 위해 현지 식물을 연구했고, 셀러리와 비슷한 식물을 발견했다. 이 식물은 비타민 C가 풍부했고, 이후 '스커비 그래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구조까지의 긴 여정
1741년 10월, 월동이 끝나갈 무렵 선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존 벌클리가 이끄는 73명의 선원들은 자체 제작한 보트로 북쪽을 향했고, 함장 데이비드 칩이 이끄는 나머지 선원들은 남쪽으로 향했다.
벌클리의 그룹은 칠레 해안을 따라 놀라운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보트는 비록 조잡했지만, 바다표범 가죽으로 만든 돛과 즉석에서 제작한 나침반으로 항해가 가능했다. 현지 원주민들의 도움도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초나족 원주민들은 식량과 피난처를 제공했고, 안전한 항로를 알려주었다.
남쪽으로 향한 함장 칩의 그룹은 더 큰 시련을 겪었다. 파타고니아의 거친 해안은 그들의 보트를 산산조각 냈고, 많은 선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들은 육로로 이동을 시도했고, 마침내 포르투갈령 브라질에 도달했다.
해상 생존의 교훈: 인간 한계를 넘어선 의지
HMS 웨이저호의 생존 사건은 18세기 해상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생존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처음 난파 당시 140여 명이었던 선원들 중 최종적으로 영국에 돌아온 것은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는 그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생존률이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 협력의 힘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선원들은 서로를 돕고 지지했다. 둘째, 인간의 적응력이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 방법을 찾아냈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극복했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중요성이다. 구조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놀라운 생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해상 생존 교육에서 중요한 사례로 활용되고 있으며, 인간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Q & A
Q1: 선원들은 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떠났나요?
A1: 구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북쪽은 스페인 식민지가, 남쪽은 포르투갈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방향이 생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Q2: 현대의 구조 장비가 없던 시절, 어떻게 그렇게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나요?
A2: 당시 선원들은 뛰어난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해류와 별자리를 이용한 항해가 가능했습니다. 또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육지를 표지로 삼았습니다.
Q3: 이 사건 이후 영국 해군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A3: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해군은 극지방 항해에 대한 생존 교육을 강화했으며, 구명 장비와 비상 식량 등의 준비 체계를 개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