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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노크 식민지의 미스터리: 사라진 116명의 정착민들

 1587년, 북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건설된 영국 식민지에서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16명의 정착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로어노크 식민지의 실종은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로 남아있으며, 4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의 작은 섬에 세워진 이 식민지는 영국의 신대륙 개척 야망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를 이끌던 존 화이트 총독이 잉글랜드로 물자를 구하러 떠난 후, 그가 3년 만에 돌아왔을 때 목격한 것은 완전히 버려진 정착지였습니다. 총독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정착민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나무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단어뿐이었습니다.


로어노크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로어노크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로어노크 식민지의 설립과 배경

 16세기 후반, 유럽의 강대국들은 신대륙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영국은 스페인의 신대륙 독점에 맞서기 위해 북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1584년, 월터 롤리 경은 여왕의 허가를 받아 첫 탐사대를 파견했습니다. 탐사대는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위치한 로어노크 섬을 발견했습니다. 이 섬은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스페인 함대의 공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있어 식민지 건설의 최적지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지역 원주민들과의 초기 관계였습니다. 탐사대는 크로아톤(Croatoan) 부족과 로어노크(Roanoke) 부족을 만났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영국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두 원주민 청년 만테오(Manteo)와 완체세(Wanchese)는 영국으로 건너가 통역관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롤리 경은 이러한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식민지 건설을 건의했고, 여왕은 이 새로운 영토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버지니아'라 명명했습니다. 이렇게 로어노크 식민지 건설의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정착과 실패

 1585년, 영국은 로어노크에 첫 번째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총 108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정착민들이 랄프 레인 총독의 지휘 아래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스페인 선박을 약탈하기 위한 해적 기지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시작되는 듯했으나, 곧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부족이었습니다. 정착민들은 농사 경험이 없었고, 대부분이 군인이나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급자족에 실패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식량을 의존하던 상황에서, 한 영국 정착민이 은제품을 도난당했다는 이유로 원주민 마을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로어노크 부족은 영국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식량 공급도 중단했습니다. 굶주림과 원주민들의 공격 위협에 시달리던 정착민들은 158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함대가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갈 때 전원 영국으로 귀환하고 말았습니다.

 이 첫 번째 정착 실패의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농업 기술을 가진 정착민들의 필요성, 원주민들과의 평화로운 관계 유지의 중요성, 그리고 충분한 보급품 확보의 필수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두 번째 정착 시도에 반영되었습니다.



두 번째 정착과 존 화이트 총독

 1587년 7월, 두 번째 정착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존 화이트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정착민들의 구성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군인과 모험가들 대신 농부, 목수, 대장장이 등 실질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었으며, 여성과 아이들도 함께했습니다. 총 116명의 정착민 중에는 존 화이트의 딸 엘리너 데어와 그녀의 남편 애넌이어스 데어도 있었습니다.

 8월 18일, 이 식민지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존 화이트의 손녀이자 엘리너의 딸인 버지니아 데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신대륙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인 아이였으며, 이 땅의 이름을 따서 '버지니아'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정착민들은 곧 심각한 물자 부족에 직면했습니다. 늦은 시기에 도착한 탓에 농작물을 심기에는 계절이 맞지 않았고, 가져온 보급품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정착민들은 존 화이트 총독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추가 물자를 가져올 것을 요청했습니다.

 존 화이트는 떠나기 전, 정착민들과 약속을 했습니다. 만약 위험에 처해 떠나야 할 경우, 목적지를 나무나 울타리에 새기고 위에 십자가를 새기기로 했습니다. 이는 강제로 떠나야 했음을 의미하는 신호였습니다.

 1587년 8월 말, 존 화이트는 영국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최대한 빨리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 위협으로 인해 모든 배들이 징용되면서, 그의 귀환은 계속해서 지연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로어노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3년이 지난 1590년의 일이었습니다.


로어노크 정착지의 모습 (상상도)
로어노크 정착지의 모습 (상상도)


식민지의 실종과 발견된 단서들

 1590년 8월 18일, 존 화이트가 마침내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완전히 버려진 식민지였습니다. 그의 딸과 손녀를 포함한 116명의 정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식민지는 질서정연하게 철거된 상태였고, 폭력이나 급박한 상황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화이트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단서는 두 가지였습니다. 요새의 입구 기둥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글자와, 나무에 새겨진 'CRO'라는 글자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글자들 위에 약속했던 십자가가 새겨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착민들이 강제로 떠난 것이 아님을 시사했습니다.

 또 다른 발견은 정착민들이 요새의 통나무 울타리를 해체해 간 흔적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계획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화이트는 크로아탄이 인근 크로아탄 부족이 사는 헤터러스 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악천후로 인해 화이트와 그의 탐색대는 헤터러스 섬을 수색하지 못했습니다. 폭풍우가 심해지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고, 이후 화이트는 더 이상 로어노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1593년 아일랜드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족들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았습니다.



제기된 가설과 추측들

 로어노크 식민지의 실종에 대해 수세기 동안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역사학자들과 연구자들이 제시한 주요 이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크로아탄 부족 합류설입니다. 가장 유력한 이 이론에 따르면, 정착민들은 식량 부족과 생존의 위협 속에서 우호적이었던 크로아탄 부족에 합류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19세기 초반, 크로아탄 부족의 후손들 중에서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 중에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구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스페인 학살설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북미 대륙에서 영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페인 함대가 식민지를 습격하여 정착민들을 학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발견된 흔적들이 평화로운 이주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셋째는 다른 원주민 부족 납치설입니다. 적대적이었던 로어노크 부족이나 다른 부족들이 정착민들을 납치했을 가능ibility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폭력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과 요새가 질서정연하게 해체된 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넷째는 체서피크만 이주설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정착민들이 체서피크만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원래 계획되었던 정착지가 이 지역이었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왜 'CROATOAN'이라는 단서를 남겼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현대의 연구와 새로운 발견

 최근 수십 년간 현대 과학 기술과 고고학적 방법을 동원한 새로운 연구들이 로어노크 미스터리 해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2015년, 고고학자들은 케이프 크릭 인근에서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16세기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파편들과 함께 총기 부품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는 일부 정착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특히 이 지역이 크로아탄 부족의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8년에는 위성 영상과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연구팀은 16세기 말의 해안선 변화와 기후 데이터를 분석하여, 당시 정착민들이 직면했을 환경적 도전을 재구성했습니다. 분석 결과, 1587-1590년 사이에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가장 최근인 2022년에는 DNA 분석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연구진은 현재 크로아탄 부족의 후손들과 영국 정착민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DNA를 비교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두 집단 간의 유전적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미스터리가 남긴 영향

 로어노크 식민지의 미스터리는 4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미스터리를 넘어 미국의 초기 정착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1607년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시에는 로어노크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체계적인 계획과 충분한 물자를 준비했습니다. 특히 원주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더욱 신중한 접근을 시도했죠.

 현대 문화에서도 로어노크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소설,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이 미스터리를 다루었고, 특히 미국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6에서는 로어노크 실종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루었습니다.

 더불어 이 사건은 현대 고고학과 역사학 연구 방법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연구 방법들이 이 오래된 미스터리 해결을 위해 도입되면서,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Q & A

Q1: 존 화이트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 3년이나 귀환이 지연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A1: 1588년은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절정에 달한 해였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하려 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모든 선박을 전쟁에 동원했습니다. 존 화이트는 두 차례 로어노크로 돌아가려 시도했지만, 첫 번째는 프랑스 해적의 공격으로, 두 번째는 악천후로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가 세 번째 시도에서 로어노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Q2: 로어노크 식민지의 위치는 현재 어떻게 되어있나요?

A2: 현재 로어노크 식민지가 있었던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포트 롤리 국립 역사 유적지'(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방문객 센터에서는 식민지의 역사와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미국 최초의 영국 식민지의 흔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